히포시 뉴스

여성신문과 유엔여성이 함께하는 히포시 캠페인

히포시, 남성이 함께 하는 여성운동

201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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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포시 캠페인에 참여한 스페탄 뢰벤 스웨덴 총리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UN Women

 

히포시(HeForShe) 캠페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엔여성(UN Women) 홍보대사인 배우 에마 왓슨의 연설 동영상 때문이다. 아직 앳된 모습의 그녀가 긴장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모든 것을 다 누린’ 여배우이면서도 성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남성들에게 성평등 운동에 참여하길 호소하며 “내가 아니면 누가, 그리고 지금 아니면 언제”가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그녀의 물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로 이 캠페인은 지난해 7월 시작된 이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남성’ 유명 인사들을 포함해 30여만 명이 넘는 남성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 히포시를 문자 그대로 ‘여성을 위하는 남성’이라고 직역하기도 하지만, 난 이 캠페인을 ‘남성이 함께 하는 여성운동’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사실 성평등 운동에 남성의 참여를 주장하는 에마 왓슨의 연설을 보면서 “아 이제 여성운동의 또 다른 세대가 등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성학을 처음 접했던 1980년대 당시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좀 더 급진적인 사람들은 남성과 분리된 독자적인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서구 여성들도 그랬지만, 한국의 여성운동가들 역시 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 내 남성 중심성과 성별 위계, 성차별, 성폭력 등에 대한 뼈아픈 경험과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다. 많은 여성운동가들은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 여성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거다” 혹은 “중요한 정치적 상황에서 조직 내 성폭력 운운하는 건 쓰나미가 밀려드는데 한가로이 조개나 줍는 행동이다”라고 일갈하는 진보 진영 남성들에게 실망했었다.

나 역시 여성학회나 여성단체 주관 행사에 와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우리집에서는 우리 아내가 최고 권력자”라고 ‘유머’를 던지는 남성 학자들을 보며, “진보 진영이나 소위 학자라고 하는 남성들도 이러니…” 하는 실망과 “남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가 보다”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반성폭력, 반성매매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운동가들이란 ‘남성을 적으로 보는 여성들’이라는 고정관념이 더욱 강해졌고, 군가산점제 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여성운동의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여성운동이 ‘여성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더욱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인터넷을 통해 여성이나 여성학, 여성운동에 대한 폄하와 비하가 격렬하게 가시화된 시점이기도 하다. 정부의 자문회의나 다른 학회에 가서 만나는 분들한테 “여성학이나 여성운동 하는 분들이랑 말하는 게 불편하고 조심스럽다”는 말을 종종 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여성주의자들은 기존의 자연스럽게 혹은 익숙하게 받아들여져온 관습이나 문화,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변화돼야 하는 차별적 사회구조라고 이야기한다. 그 변화를 위해 새로운 관점이나 이론, 비판적인 논쟁을 제기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남성적인 문화와 규범을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퍼포먼스나 운동도 전개한다.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는 흔히 듣기에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또 때로는 공격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여성’은 사회적 소수자라기보다 이미 가진 권력 위에 더 가지려고 하는 이기적 집단이라고 보는 사회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여성운동 진영이 감내해야 할 몫인지도 모른다.

지난 30여 년간 이런 경험 없이 히포시 캠페인을 만났다면 언뜻 너무 가볍고 낭만적인 운동이라고 비판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남성들을 보며, 여성주의자들인 많은 선배와 동료들의 경험을 뒤돌아보며, 새삼스럽게 또 다른 여성운동의 희망과 단서를 발견한다. “그래! 이제 남성이 함께 하는 여성운동이 필요해!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듯, 세상의 절반이 남성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여성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소수나마 남성들 역시 참여해왔고, 남성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해 온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운동과 변혁의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의식적 강조, 남성들의 참여는 결국 일정 부분 이상을 넘지 못할 거라는 의심이 남성과 함께 하는 여성운동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경우 히포시 캠페인에 대한 주목도가 낮고, 참여 남성 수도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더 적다고 한다. 인구 비례로 보면 이 캠페인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라가 세계 최고의 성평등 국가로 꼽히는 아이슬란드라고 하니, 어쩌면 한국의 낮은 참여율은 한국의 성평등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자 한국 여성운동의 대중성과 방향성을 다시 성찰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명선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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