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시는 모두를 위한 진보다
▲ 3·8세계여성의 날 대구여성대회에서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로 있는 김태일 영남대 교수가 연대사를 하고 있다. ©김태일
나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거기서 나는 남자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신 할머니는 아들 형제를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나는 그 맏이에게서 난 첫손자였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 남자로 자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대학에서 민주화, 인간화를 고민하는 또 다른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할머니의 품을 전부로 알면서 그저 그런 남자로 살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은 다 하늘처럼 귀하며 평등하다는 여성주의의 이치를 깨우쳐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운명이기도 했다.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만난 여성문제 연구자와의 결혼도 그러한 인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운명은 그러나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자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십대까지의 가슴과, 사람은 모두가 하늘처럼 귀하며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이십대 이후의 머리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슴과 머리의 불화 때문에 나의 결혼 생활은 도를 닦는 것과 같은 힘든 수련 과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노력했고, 고통 속에 여성주의의 내공도 늘어났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내 또래의 한국 남성으로서는 흔치 않은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여성교육 시민단체인 대구경북여성사회교육원 공동대표다. 여성단체의 남성 대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성매매 방지 남성 100인 선언에도 참여했다. 지난 봄, 3·8 세계 여성의 날 대구여성대회에서 나는 대구 시민단체를 대표해 연대사를 했다.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대구퀴어축제조직위원회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대구시 행정기관이 대구퀴어축제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후배들이 나에게 일인시위를 하라고 했는데 오래전 약속한 해외 여행이 아니었으면 일인시위까지 할 뻔했다.
물론 나는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여전히 인식 수준은 낮고 설명력은 부족하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나는 즐겁다. 왜냐하면 여성이 살기 좋은 사회는 다른 모든 소수자들에게도 좋은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히포시(HeForShe)는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지난 3월, 대구여성대회에서 연대사를 하면서 나는 이렇게 외쳤다. “성차별이 없어지면 다른 모든 사회적 차별도 없어집니다. 장애인, 노인과 어린이, 결혼이주여성, 북한이탈주민,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도…. 성평등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출발입니다!”
히포시는 여성만을 위한 몸짓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진보다. 나눔, 배려, 돌봄, 상생, 협력, 평화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운동이다. 차별 없는 세상,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런 활동에 대해 나의 아내와 딸, 그리고 나의 친구 여성운동가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남성들로부터의 지지도 적지 않다. 내가 자랑 삼아 페이스북에 히포시 인증샷을 올렸더니 어떤 남자 후배가 ‘He For & With She’라는 댓글로 애교를 보낸다. 나보다 생각이 깊은 남성인 것 같다. 요컨대 내가 여성신문에 인증사진을 보낸 까닭은, 히포시가 모두를 위한 진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으며 전국대학통일문제연구소협의회 이사장, 대구경북학회 회장,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대구경북여성사회교육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