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시 뉴스

여성신문과 유엔여성이 함께하는 히포시 캠페인

어린이날 제정 앞장선 『개벽』 주필 김기전은 근대의 대표적 ‘히포시’

201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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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불려

 

소유관념에 기반한 결혼은

‘송장혼인’ ‘허튼 혼인’

기혼남성 축첩도 비판

 

여성해방운동 주장한

근대의 대표적 남성 페미니스트

 

소춘 김기전은 근대의 대표적 남성 페미니스트다.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불려온 교육사상가인 그는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며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다. 당시 여성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며 여성해방운동을 주창한 선구적 근대 지식인 ‘히포시(HeForShe·여성을 위한 남성)’이기도 했다.

김기전을 ‘히포시’로 부르는 이유

1894년 6월 13일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난 김기전은 천도교 도정(道正)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를 찾아오는 동학 지도자들의 덕망과 언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천도교에 귀의했다. 보성전문학교 법과 야간과정을 1917년 3월 제10회 졸업생으로 끝냈다.

김기전은 3·1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천도교의 청년운동·문화운동을 통해 독립 운동에 헌신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잡지 『개벽』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천도교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이어 천도교 사상인 인시천(人是天, 사람이 한울이다)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글 30여 편을 남겼다. 천도교 청년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다.

김기전은 조선 사회가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폐단에 젖어 어린이를 억압하며, 특히 부모가 딸에게 “저 ㅅ다위년은 더러 죽어도 조흐렷만은”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딸을 쓸모없는 자식으로 차별하고 천대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딸의 혼사를 마음대로 정하고 혼인을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또 여성은 결혼 후에는 남편과 시집 식구들에게 복종해야 하고 과도한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여자의 경우야말로 과연 참혹하의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밤낮없이 일하는 여자는 사회의 맨 밑층에 쓸어 넣고 그 등에서 살아가는 사내놈들은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도리어 일반 여자를 압박하고 무시”했는데, 남자들만큼 “남을 무시하고 엎누르기 좋아하는 패는 없다”고 주장해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주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내리누르거나 쳐다보는데 있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 서로 보충해 나가는 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남녀는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보완해나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남녀 상호간에 사람성을 인정”하고, 남녀가 제각기 경건한 마음으로 서로 대해야 하며 서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김기전은 결혼하는 그 즉시 “한 개의 주인과 한 개의 몸 팔이 꾼이 서로 모여서 기계적으로 생산과 싹바듸로 품팔이를 하고 있는 셈”으로 규정하고, “이 한편이 저 한편을 내리누르거나 쳐다보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남녀관계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적으로 의존하면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부부관계는 서로 어우러져 보충해나가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소유관념에 기반한 결혼을 ‘송장혼인’ ‘허튼 혼인’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구원해내라고 촉구하며, 결혼 생활의 일생은 한없는 창조의 기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결혼 후에 남편은 첩, 오입이라는 이름 밑에서 축첩과 성매매를 자행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혼외관계는 근본적으로 여자를 무시 경멸하는데서 생긴 일종의 ‘놀림수’이며 남편이 아내를 차지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관념 때문에 생겨난 폐단이라고 지적했다.

 

▲ 소춘 김기전 선생.

 

“신여성, 사회변혁 운동에 나서라”

그는 여성이 열악한 현실에 처하게 된 데는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는데,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살림을 창조하려 하지 않고 남편이라는 사람의 처분 밑에 한평생을 맡겨보자고 작정하고, 그래서 어찌하면 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마음성이 좋고 신체가 건강한 새서방을 얻어 일생을 편안히 지낼까 하고 밤낮으로 근심 걱정을 한다고 했다.

또 여성들이 “자기가 눈이 빠지고 뼈가 곯토록 일하면서 그 계산은 전혀 남자에게 맡겨버리고 마는 것이 통례”라고 하면서 의존적이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태도는 ‘그릇’되고 “여자의 모든 것이 병든 것이 사실”이며, 종래의 인습으로부터 유래된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성들에게 권고했다.

김기전은 여성에 대한 위로와 격려도 잊지 않았다. “부지런한 생활을 한 사람이 한층 진리(眞理)에 가까운 생활을 한 사람이라 말 할 수가 있다 하면, 조선의 여자는 조선의 남자보다 한층 이치(理致)에 맞는 생활을 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사내놈들은 뭐, 정치니, 세도니, 윤강이니, 도덕이니 하며 그 밑에서 온갖 협잡, 온갖 불의(不義), 갖은 음탕을 다 부려 오는 그 중에 오직 여자 된 그들만은 고요히 고요히 집을 지키고, 향토를 붓 안고, 농사를 짓고 옷을 지으며, 또는 자손을 양육하여, 단 하루 일지라도 놀고먹은 적이 없었나니, 우리가 특히 조선 남자 된 우리가 조선여자의 역사적 근로(歷史的 勤勞)를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맘과 감사한 눈물이 아울러 흐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조선 여성들은 “옛 사회의 혈육이오. 새 사회의 골격이올시다”라고 했다.

 

▲ 소춘 김기전 선생이 조직한 비밀결사 오심당 사건의 전모를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21일자 신문(위), ‘동아일보’가 1927년 2월 28일자 신문에 게재한 소춘 김기전 선생의 글 ‘정치적 각성’.

 

그는 이러한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초래하는 억압과 차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자각해 인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여성으로 거듭나서 해방돼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여성에게 한 인간으로서 독립된 지위를 부여받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하며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길러내는 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주창했다.

김기전은 여성 억압에 있어 사회 제도가 가장 근원적인 요인임을 인식하고 사회제도 변혁 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기전은 조선 여성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여성해방을 주도할 신여성을 기르는 데 있으며, 교육 받은 신여성들은 여성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번민을 느끼고 필연적으로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제도 변혁 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여성해방론은 당시 조선 여성들이 고통 받고 있었던 억압된 삶을 극복해 새로운 삶을 살기를 기대하는 획기적인 담론이었다.

김기전은 일제의 감시 하에서 잡지『개벽』을 발간하느라 “종로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듯 불려 다니곤 하”였고, 1934년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조직이 탄로나 검거되는 등 천도교 활동을 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 1936년에는 폐결핵 3기로 진단받고 10여 년간 신앙생활과 결핵치료에 몰두하면서 일제강점기말에도 창씨개명이나 그 어떠한 반민족적 행위도 거부했다. 그는 해방 후 이북 천도교회 재건을 목적으로 이돈화와 함께 북한으로 갔으나 1948년 3월 반공의거운동(3·1재현운동)이 일어났을 때 행방불명됐다.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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